본문 바로가기

[일기장] 증명사진

 

들어가며

삶을 계획하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고자 계획을 세우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대로 하루를 살았을 때, 하루를 온전히 잘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로 인해 삶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계획되지 않은 일들로 하루를 보낼 때, 때로는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며 자책하는 날도 있었지만,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 그 하루가 행복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당신의 부고를 접하고, 우리가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려 봤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신과 함께 하루를 보내면 항상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지만,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그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마웠다고 꼭 표현해야지 하며 마음속으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늘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들어줬던 당신은 이번에도 제 삶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게 했습니다. 당신과 계획되지 않은 일들을 했을 때 항상 행복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습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고맙다고, 제대로 표현 한 번 못했는지, 후회만 가득합니다.

언젠가는, 사는 게 바빠 소중했던 당신에 대한 기억을 어쩌면 잊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을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당신과 단둘이 찍은 사진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당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파하다 문득 서랍 속 당신의 증명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스무 살을 기억하고 싶다며 증명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사진이 필요할 거라며 투박하게 사진 몇 장을 제게 건넸는데, 당신의 증명사진을 찾고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당신은 제게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만들었고, 제게 행복을 줬습니다.

좋은 친구와 함께 젊은 날을 보냈다고 자랑하고 싶어, 글을 적습니다. 친구와 함께 했던 일들을 적어보면서, 당신을 추억하고 싶어 이 글을 씁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던 당신을, 고등학생이 되어 재회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처럼 힘든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며, 대학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며 제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저와 함께 노력하며 가고 싶어 했던 '청소년 문화상담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신은 제게 자신의 인생을 바꿔줘서 고맙다며 이야기했습니다. 꼭 보답하고 싶다며 자신의 집으로 저를 초대했고, 당신의 소중한 친구들도 제게 소개했습니다. 그날 당신 덕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셔봤습니다. 당신은 처음 술을 마시던 제게 술에 대한 예절을 알려줬습니다. 당신이 가르쳐준 예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의 바다

당신은 낭만적이었습니다. 어느 자정이 넘은 시간, 당신은 문득 차를 끌고 우리 집 앞으로 와서 제게 연락했습니다. 을왕리에 가서 바다를 함께 보러 가자며 나오라고 했던 당신이 생각납니다. 차를 운전해서 와서 술은 못 마시니 칼국수라도 함께 먹고 가자며, 밤의 겨울바다를 구경시켜주던 당신.

 

당신과 밤바다를 보면서 걸었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에게 받았던 고마움이 너무나 커서, 저도 당신처럼 누군가에게 바다 보러 가자며 누군가의 집 앞에서 기다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받았던 고마움, 당신에게 갚지 못해 미안합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글을 적는 시간이 당신과 함께 을왕리에 갔던 시간입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할 테니, 당신은 옆에서 바다 구경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이제 밤바다를 보면 어쩌면 당신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마치며

당신에게 받은 고마움 한 둘이 아니지만, 당신이 제 생일이라며 무심하게 생일 케이크 하나 사서 케이크 하나로 밤을 새웠던 날이 생각납니다. 친구와 낚시를 해서 회를 떴는데, 맛있는 걸 먹으니 너 생각이 났다며, 초대했던 당신의 마음이 생각나고, 멋지게 누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던 당신의 목소리가 생각납니다.

 

사진 찍는 것이 취미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 하나 없다는 것이 한심스럽습니다. 당신과의 이별을 조금이라도 준비했더라면, 당신이 술 한잔 하자며 보고 싶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사는 게 바빠 애써 외면했던 제 스스로가 한심스럽습니다. 이제야 당신이 무척이나 보고 싶습니다. 

 

영정사진 속 당신의 미소가 잊히지 않습니다. 연락하면 금방이라도 전화가 올 것 같은 내 친구. 왜 그리 무심하게 떠났냐고 수백 번이고 묻고 싶은데,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에게 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뿐입니다.

 

언젠가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당신처럼 증명사진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사진이 언젠가는 제 소중한 사람에게 웃음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추운 겨울이 되는 어느 날, 좋은 향기가 나는 꽃을 들고 당신에게 가겠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언젠가, 좋은 술 함께 마시며 밤새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고 사랑한다 진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