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언젠가는 직접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건축에 관한 책과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건축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졌던 계기는 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보고서 였습니다. 영화를 통해 정기용 건축가의 삶의 태도, 건축을 바라보는 자세, 그의 건축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개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문득 개발과 건축은 비슷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잊고 지냈던 정기용 건축가가 떠올랐습니다. 이번 글은 정기용 건축가님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작성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가 전했던 건축에 대한 철학을 개발자로서 적용시킬 수 있는 점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사람
건축가 정기용은, 전북 무주의 주민들을 위한 건축물을 설계했습니다. 아이들이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청소년 문화의 집부터 죽은 이들이 머무는 납골당까지,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물을 바라볼 때면, 참 인간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건축물에 그의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건축물을 누가 사용하냐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며,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많은 요양원을 가곤 했는데, 요양원에 갈 때마다 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때 내가 답답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어쩌면 노인요양원의 건축이 제대로 설계되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건축가 정기용은 노인요양원 또한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건축했습니다.
병원 같은 대부분의 요양원과는 다르게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정기용 건축가는 요양원 설계 당시 내 집처럼 느껴질 수 있게끔 설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건물의 첫인상에는 기와를 얹었는데, 어르신들에게 익숙한 기와집으로 보이게끔 했습니다. 지붕 아래는 벽돌을 쌓아서 집을 닮은 외관을 완성했습니다.
요양원의 내부는 높은 층고로 설계했습니다. 높은 천장을 만들고, 앞뒤로 다 트이게 만들어서 시선이 막힌 데가 없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합니다.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은 거동이 불편해 주로 실내에 머물게 되실 텐데, 많은 사람이 실내에 모이면 답답한 느낌이 드는데 환한 분위기에서 활동하시면 좋겠다고 이런 공간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여유 있는 공용 공간 덕분에 보행 보조기를 끌거나 휠체어를 끌어도 실내 산책이 가능하게 설계했다고 합니다.
마치 집의 거실처럼, 공용 공간을 사용하고 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실제로는 자연채광임에도 전깃불을 켜놓은 것처럼 실내가 밝게 느껴지는 효과가 느껴집니다. 건축가 정기용은 요양원에 거주하는 것이 병실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집에서 머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복도를 밝은 거실처럼 느끼고, 천장을 통해 하늘을 보며 쉴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은 가장 많은 시간을 각자의 방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걸 알고 있었던 정기용 건축가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방에 종일 환한 빛이 스며들게 했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창이 하나씩 있는 것처럼 설계하여,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전체 공간이 다 밝게 느껴지도록 설계했습니다.
건축가 정기용의 건축에는 창문 하나에도 디테일이 숨어있었습니다. 작은 창문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도 왜 창문이 필요하며, 창문이 있었을 때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무수히 고민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획 혹은 개발을 하면서, 감동을 받았던 프로덕트는 항상 디테일이 숨어있었습니다. 기능을 사용하면서, 이 기능은 왜 개발했고, 이 기능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깨달을 때, 가슴 벅참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디테일을 모두 신경 쓰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 텐데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주민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기 위해 어떤 고민들을 해왔을지, 살아계셨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가 정기용은, 잠시 머무는 버스정류장도 삶이 머무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창이 있고 벽이 있고, 지붕이 있는 집이 탄생됐습니다. 단순히 버스정류장이 차만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여기 나와서 잠깐 쉬기도 하고 항상 우리 동네에 있는 내 집 같은 느낌의 장소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이라도 농촌 어르신들에게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작은 집을 선물했습니다.
쇠락해가는 농촌에 남은 주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일이 공공건축의 역할이라고 믿었던 그는 곳곳에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집을 닮은 요양원도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공간을 만들더라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으로 살 것이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부터도 언제부터인가, 크고 넓으면서도 고급스러운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공간에서 살아가더라도, 같이 살아가는 사람과 행복할 수 있다면, 함께 살아간다는 가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런 공간이야 말로 좋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행복은 아파트의 브랜드 혹은 평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닌,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건축은 근사한 형태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건축가 정기용. 그는 책을 사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 소외된 농촌지역의 주민을 위한 시설 등 공공 건축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무주 프로젝트 또한 그중 하나였습니다. 정작 자신은 소박한 월세방에 살며, 대장암과 싸우던 중, 일찍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의미 있는 공간은 여전히 사람의 삶을 섬세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그의 삶을 반추하며, 그럼, 나는 개발자로서 누군가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해본 적이 있는가 되묻게 됩니다.
영화 '말하는 건축가'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그의 언어는 기획자, 개발자에게도 훌륭한 인사이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획자로서, 내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기획으로 번역한 것이다.
개발자로서, 내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개발로 번역한 것이다.
언젠가 아무런 목적 의식 없이 일을 하게 될 때 정기용 건축가의 삶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관찰하며, 특정 도구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기획, 개발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며
건축가의 생각을 관찰할 때면, 평소 관심있게 바라본 적 없던 공간도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건축과 공간에 대해 알아갈수록, 건축을 재테크의 수단이 아닌, 삶의 공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 삶 주변을 다시 한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이이 공간은 왜 만들어졌고, 누구를 위한 공간이며, 공간이 주는 가치는 무엇인지 등을 스스로 사유할 수 있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페인, 포르투갈에 다녀왔다면, 이제는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무주에 소중한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물들을 돌아보며, 언젠가 정기용 건축가처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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