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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아홉수 소년

 

 

당신에게

당신을 아홉 살에 처음 만났습니다. 운이 좋게도 고등학교 때 재회하여 잊지 못할 행복한 열아홉을 보냈고, 당신을 스물아홉에 보냈습니다. 우연하게도 아홉이 들어간 나이에 당신과 늘 함께 했습니다. 한국에는 나이의 끝자리에 9가 오면 해야 할 일을 다음 해로 미루는 미신이 있는데, 괜찮다면 당신을 보내는 일 또한 미룰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인생이 힘들 때, 술 한 잔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해준 당신. 언제 한 번 당신이 생각나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초등학교와 당신이 살았던 집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술에 취해 함께 걸었던 공원과 잠깐 시간나면 맥주 한 잔 하자며 나오라고 했던 호프집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습니다. 혹여나 사는 게 바빠 당신을 잊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한 공간에 갔을 때 당신이 생각날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야속하게도 당신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흐릿해질 때마다 꿈에서라도 한 번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은 어느 날 당신이 제 꿈에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함께 했던 고등학교 어느 교실 책상에 계속 엎드려있었습니다. 제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서. 당신의 얼굴을 보기 전에 꿈에서 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잠에서 깼습니다. 평소 꿈을 꾸면 다 잊어버리는데, 그 날만큼은 유독 꿈이 선명했습니다. 당신이 제 꿈에 나타나서였을까요, 무척이나 반가워서 하루가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요. 꿈에 당신이 반갑게 나왔습니다. 당신은 제게 자신을 꼭 보러 오라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일 전 날, 이런 꿈을 꾼 것이 반갑기도 하고, 당신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꽃 한송이 들고,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던 친구와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당신 앞에 선다면, 특별한 한 마디 건네고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신 앞에 서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 앞에 조그마한 수첩이 걸려 있었고, 글을 적는다면 당신이 두고두고 그 글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수첩에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었습니다. 한 글자씩 눌러 담아 수첩에 글을 적고 무심코 앞으로 넘겼을 때, 당신의 부친께서 당신을 위해 작성한 글을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기도를 하는 날이 온다면 당신의 남아있는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05.20. 박상수.

 

 

 

 

 

ps. 언젠가 당신과 함께, 살아온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술 한 잔 하는 날이 오겠죠. 꿈에 자주 나타나줘 진호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