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막차를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낚시를 해서 회를 떠놨으니, 집으로 와서 회에 소주 한 잔 하자고 내게 말했다. 개인적으론 계획에 없는 행동은 잘하지 않기에, 다음 날 중요한 일정이 있다고 둘러대며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시 연락이 왔다. 친구였다. 친구는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매운탕까지 끓여놨다고 했다.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잠시 발길을 친구의 집으로 돌렸다.
친구의 집에 도착했을 땐, 내가 모르는 다른 친구들이 자리에 있었다. 내 친구는 처음 보는 다른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열심히 사는 친구이며, 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고마운 소중한 친구'라고 나를 소개해줬다. 그러고 친구는 내게 소주 한 잔 따라주며 왜 이렇게 바쁜 척하냐며, 너는 정말 못됐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봐달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는 잘할 거라고, 멀리서 응원하고 있다고 친구는 내게 말했다.
술을 어느 정도 먹었을 때였나, 친구는 내 덕분에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덕분에 공부를 마음 잡고 시작할 수 있었다고, 덕분에 꿈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친구의 도전을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는 반면, 오히려 선명해지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친구와 함께 소주 한 잔 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친구와 함께 했던 많은 날들 중에서 왜 이때가 선명하게 기억될까 생각해 봤다. 가끔 나 조차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며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가 있었다. 초라했던 내 젊은 날, 친구는 나의 가능성을 봐줬다. 덕분에 고마웠다고, 너는 해낼 수 있다고, 힘들 때 연락하면, 언제든 술 한 잔 사겠다고 말했던 친구가 너무 고마웠기 때문에,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친구의 기일이 돌아왔다. 어김없이 겨울은 왔고, 키 크고 덩치 큰 듬직한 친구는 아주 작은 공간에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나도 당신처럼 누군가의 가능성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가끔,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 날이면,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친구에게 소주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올 것만 같아 핸드폰을 뒤적거린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당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중한 기억들도 언젠가는 잊어버릴 수 있기에, 당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당신과 함께 했던 순간을 글로 남긴다.
당신처럼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당신을 만나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인사하고 싶다. 열심히 사는 친구라고 당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해준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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