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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티처스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봤다. 방송에서는 영어 점수가 11점인 학생이 69점으로 향상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방송을 보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반에 들어갔을 때 충격을 잊지 못한다. 중학생 때와는 다르게 반의 많은 친구들이 자신의 책을 꺼내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 친구들은 공부를 왜 할까? 생각했지만 친구들이 공부를 하건 말건, 나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수업은 잘 듣지 않았고, 쉬는 시간에 매점에 달려가서 빵을 사 먹거나 학교 끝나면 농구를 하거나 게임을 하면서 걱정 없이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중간고사를 봤고, 결과는 처참했다. 

 

 

내 성적을 본 담임선생님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따로 나를 불렀다. 선생님은 내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며 물었다. 당연히 목표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기에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공부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울테니 조금씩 공부를 해보자고 하셨다. 참고서 살 돈이 없다면 교무실로 들어오는 참고서를 모두 줄 테니, 조금이라도 책상에 앉아 있어 보자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을 잘 들었다면 다행스럽겠지만, 나는 그렇게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금도 공부하기 싫어서 야간자율학습에 도망쳐서 피시방에 가기도 하고, 선생님을 피해 다니며 친구들과 놀다가 들켜서 많이 혼나기도 했다. 엎드려뻗쳐하고 있는 내 옆에서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셨던 내용이 아직도 기억난다.

 

"솔직히 선생으로서 너를 포기하면 내 할 일이 줄어드는 것이니 나는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 편하자고 네가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너는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널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어른들은 공부에 뜻이 없다면 나에게 빨리 공장에 들어가서 돈이나 벌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어른에게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이 해보고 싶어졌다.

 

공부라는 것이 마음먹는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책상에 10분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남들 공부할 때 나는 신나게 놀았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교과서를 읽어도 교과서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중학교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공부를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늦었지만 중학교 공부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성적이 쉽게 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남들 하는 것보다 더 공부를 안 하면서, 성적이 오르길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성적을 올리기는 더욱 어려웠다. 오기가 생겼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성적이 오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싶어 가장 먼저 학교에 가서 가장 늦게 집에 갔다. 주말, 공휴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공부에 욕심을 가질 수 있었다.

 

공부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교과서에서 말하는 내용이 조금씩 이해가 갔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성적을 올리려면 교과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수준이 되어야 했고,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을 활용해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문제를 풀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마음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자 공부를 포기할까 싶었던 그 답답한 순간에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다시 면담을 신청했다.

 

 

출처: 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2862

 

 

 

선생님은 내게 공부를 해서 어떤 대학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사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대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때 마침 교무실에 있는 티비에서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 논의'라는 내용의 뉴스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께 서울시립대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이 참고서 하나를 주시고는 응원한다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를 꼭 찾아오라고 언젠가는 술 한 잔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처음으로 만난 좋은 어른을 그렇게 떠나보냈다. 선생님의 영정 사진 앞에서 인사하며 반드시 당신과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다행스럽게도 시립대에 1차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과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행복했지만, 최종적으론 합격하지 못했다. 인생은 마음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불합격했다는 상심보다는, 선생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결국은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고등학교 1학년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던 때가 우연히 떠올랐다. 누군가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곤 하는데, 개인적으론 사람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프로그래밍을 처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공부하기 막막한 느낌이 들 때면 돌아가신 담임 선생님이 생각났다.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당신에게 찾아가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럼 당신은 이번에도 묵묵히 나를 응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 놓고 다시 공부할 수 있었다.

 

 

 

 

 

 

티처스 프로그램에서 성적을 올린 학생이 선생님에게 쓴 편지를 읽는 장면을 보면서 예전 고마웠던, 내 인생을 바꿔준 은사님이 생각났다. 조금만 더 살아계셨다면, 선생님과 한 약속을 지켰다고, 덕분에 인생에 목표라는 것이 생겼다고 찾아뵙고 말씀드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가득하다.

 

감사하게도, 간혹 누군가 내게 개발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공부했는지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묵묵히 내 경험을 이야기한다.

 

나는 API라는 개념을 개발 공부한 지 7개월 만에 겨우 알게 된 사람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라, 다른 사람이 일주일이면 공부할 양을 나는 한 달은 공부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2~3배는 공부해야 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공부하는데 쏟고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만약 앞으로도 누군가 내게 고민을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할 수 있다고, 가야 할 길이 멀다면 함께 걸어보자고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조금씩 선생님을 닮아가고 싶다. 나의 삶을 응원했던 당신처럼. 나도 누군가의 삶을 진정으로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먼저 더 좋은 개발자가 되어야겠다. 먼저 길을 걸어봐야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